[고진하의 시골살이] 땔나무를 쪼개다가

[고진하의 시골살이] 땔나무를 쪼개다가

입력 2017-01-04 18:12
수정 2017-01-04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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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 시인
고진하 시인
아침마다 장작을 패는 건 요즘 내 주요 일과야. 찬 구들방을 덥혀야 하니까. 정월 초하루 날도 나는 어김없이 장작을 패고 있었어. 이따금 개 짖는 소리 말고는 동굴 속처럼 고요한 마을, 장작 패는 소리가 온 동네를 뒤흔들어 놓았나 보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땀을 닦느라 쪽마루에 앉아 있는데, 누가 삐그덕∼ 대문을 밀치고 들어왔어.

“아니, 좀 쉬시지 않고 새해 첫날부터 이 고된 일을…?” 오, 사람 좋은 뒷집 장 선생. 은퇴를 앞두고 작년에 우리 마을로 양옥집을 짓고 들어와 이웃이 된 분이지.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늙은이가 정초부터 장작을 패는 모습이 안쓰러웠을까. 사실 나는 평소 몸 쓰는 노동을 즐기는 터. 이런 일로 힘들다고 엄살떤 적이 없지. 장작을 쪼개는 일은 적당히 땀 흘릴 수 있어 몸에도 좋고, 정신 집중에도 으뜸이니 일거양득이 아닌가.

“어서 와요. 고되긴 뭐, 쉬엄쉬엄하는 걸요. 사실 이런 일은 힘들지 않은데, 어쩌다 인터넷 뉴스를 열면, 나라를 통째로 말아먹은 놈들 보는 게 힘들죠. 더욱이 세월호 사태에 대해 새로운 의혹이 뻥뻥 터지고 있는데, 그런 걸 보면 마음이 짠해요.” 그랬어. 사태의 진상을 알 법한 이들이 아령칙한 답변으로 국민을 기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불쑥불쑥 일어나는 분노를 누르고 지내는 게 정말 힘들었어.

끝 간데없는 저 탐욕의 무리를 보며 한없이 울가망해지던 마음. 자기 호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다른 생명의 살 권리는 희생돼도 좋다는 거 아닌가. 물론 어떤 존재든 다른 생명의 희생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거 잘 알아. 생명이 다른 생명을 먹어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이 불가피한 현상을 누군가는 창조주의 비애라고 했지. 하지만 이런 얘기가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다른 생명의 살 권리를 빼앗아도 된다는 건 아니잖아.

다만, 지구에 주소를 둔 생명은 모두 다른 생명의 도움으로 살고 있다는 걸 깊이 자각하라는 거지. 그래서 잡초를 먹고사는 우리 가족은 흔한 잡초를 뜯을 때도 ‘미안해, 고마워!’라고 말을 건네곤 하지. 내가 먹는 존재들이 곧 내 몸이 되는 것인데, 어찌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내가 먹는 존재들은 나와 둘이 아니잖아.

이런 분명한 자각을 지니고 사는 사람은 자기 곁의 생명이 겪는 아픔에 무관심할 수 없지. 동물 희생이 보편적 관행이었던 원시 시대에도 자기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동물의 희생에 경의를 표했다잖아.

이런 경의를 표할 수 있는 마음이야말로 공감과 자비의 영성으로 나갈 수 있는 토대가 되지.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쁨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했어. 하지만 누가 과연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쁨으로 참여할 수 있을까. 보살의 마음을 지닌 자라야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아직 더덜뭇한 나는 보살의 지극한 마음과는 거리가 멀어. 그러니 타인의 슬픔에 기쁨으로 참여할 수가 없어. 그냥 타인의 슬픔에 슬픔으로 참여할 수 있을 뿐. 하지만 나이 들수록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 점점 커져.

젊을 땐 드물던 그놈의 눈물도 점차 많아지고. 하여간 모든 생명의 뿌리는 하나라는 생각에 사무칠 때가 많아. 국정 농단을 저지른 이들조차 내 존재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곤 하지. 내 안에 박근혜가 있고, 내 안에 최순실이 있고, 내 안에 또 누구누구가 있다는 생각….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내 안의 박근혜, 내 안의 최순실이 저지른 죄상이 명명백백히 밝혀져 그 죗값을 치르면 좋겠어. 심은 대로 거둔다는, 하늘 그물이 성긴 것 같아도 빠트림이 없다는 저 천상의 법대로 대가를 받으면 좋겠어. 누군가 아프면 나도 아프겠지만, 그것이 우주의 성스런 질서를 구축해 가는 일이므로.

에구, 정초부터 땔나무를 쪼개다가 문득 찾아온 뒷집 장 선생 때문에 주저리주저리 온갖 수다를 다 떨었네. 장 선생을 보내고 나서 쪼갠 나무를 수레로 실어다 바깥채 처마 끝에 쌓았어. 며칠 더 나무를 패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을 것 같아. 가지런히 쌓아 놓고 보니 아낌없이 자기를 내어주는 나무에게 절로 고마운 마음이 새록새록 하네.
2017-01-05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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