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늙은 호박/이동구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늙은 호박/이동구 수석논설위원

이동구 기자
입력 2019-10-22 17:28
수정 2019-10-23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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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도 않았던 호박덩이가 굴러왔다. 한여름 내내 받았을 뙤약볕과 땅의 기운을 가득 머금은 듯 누런 황금빛의 늙은 호박. 울퉁불퉁한 주름을 깊이 새겨 마치 커다란 꽃을 피운 듯한 모습이다. 어른 얼굴 두 사람분의 크기는 충분히 돼 보였다.

휴일 낮, 늙은 호박 하나를 다듬었다. 반으로 잘라 씨를 들어내고, 껍질을 까는 게 제법 힘들었다. 금방 끝날 것 같았던 호박 손질이 거의 한 시간가량 걸렸지만, 가을 향기를 가득 머금은 향내가 솔찬히 좋았다.

호박전은 약간의 밀가루와 소금이면 맛을 낼 수 있다. 그래도 아내의 손맛이 들어야 제맛이다. 아내가 정성껏 버무린 호박 반죽을 불 위에서 잘 지지면 노란색의 꽃잎처럼 예쁜 호박전이 된다. 너무 달지도, 강하지도 않은 담백한 느낌의 호박 맛이 그만이다. 한 접시를 순식간에 먹어 치웠지만 왠지 허허롭다.

못다 느낀 늙은 호박의 깊은맛은 범벅으로 채웠다. 호박 죽에 찹쌀가루와 팥, 밀가루 등을 조금씩 섞어 걸쭉하게 끓인 범벅. 그 속에 어린 시절과 어머니에 대한 추억도 담겨 있다. 노란색의 연한 범벅 빛깔에서 희미해진 옛 모습들이 아련히 떠올랐다. 달콤한 맛과 향이 몽골몽골 솟았다.

yidonggu@seoul.co.kr
2019-10-23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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