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까지 밝혀진 파리 도심 연쇄 테러의 줄거리는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16일(현지시간) 밝힌 것처럼 “시리아에서 계획되고 벨기에에서 조직돼 프랑스에서 실행에 옮겨졌다”로 요약할 수 있다.
벨기에에 사는 무슬림들이 테러의 ‘숙주’인 이슬람국가(IS)의 본거지 시리아로 건너가 극단적 지하디즘(이슬람 성전주의)에 포섭된 뒤 IS의 지령을 받아 ‘이슬람의 적’ 프랑스에서 동시 다발 테러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는 2001년 미국에서 벌어진 9·11 테러의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당시 알카에다의 오사마 빈라덴은 1998년 케냐·탄자니아 주재 미 대사관 동시테러 뒤 자신의 숨통을 조여오는 미국에 전세를 뒤집는 반격을 모색하던 중이었다.
1993년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 지하주차장 폭탄테러의 기획자 칼리드 셰이크 모하마드는 이런 빈라덴을 1999년 초 만나 항공기를 납치해 미국의 주요 시설물을 타격하는 전대미문의 테러를 논의한다.
실행 가능성에 의문을 가지면서 망설이는 빈라덴은 때마침 그의 앞에 나타난 함부르크 셀(또는 함부르크 그룹)을 만나면서 결심을 굳히게 된다.
독일 함부르크-하르부르크 기술대에 유학하던 모하마드 아타 등 당시 20대의 무슬림 4명은 함부르크의 한 아파트에서 함께 지내며 이슬람 극단주의에 젖어들었다.
이들은 고학력인데다 서구적 매너가 몸에 배고 영어에 능통해 의심을 받지 않고 미국으로 침투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뉴욕 세계무역센터 등 표적으로 납치한 여객기를 몰고 가려면 조종사 교육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언어와 학습 능력은 필수적이었다.
알카에다의 근거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빈라덴을 만나 충성을 맹세한 이들은 함부르크로 돌아가 미국 본토에 대한 항공기 테러를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이때부터 그들의 아파트는 알카에다 대원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소굴이 됐다.
함부르크 셀 4명 중 3명은 2000년 5월 미국 플로리다의 비행학교에 입학, 조종사 교육을 받은 뒤 2001년 추가로 합세한 알카에다 조직원 14명과 함께 9·11 테러라는 역사를 뒤흔든 사건을 가능케 한 장본인이 된다.
즉, 9·11 테러의 경위를 이번 파리 테러에 대입해 요약하자면 “아프가니스탄에서 계획되고 독일에서 조직돼 미국에서 실행에 옮겨졌다”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이 테러의 ‘삼각 네트워크’의 주어가 14년 만에 알카에다에서 IS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렇게 테러의 계획과 조직·공모, 실행 장소가 모두 다른 나라가 되면 이를 사전에 막아내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테러가 실행에 옮겨지기 전에 적발해내려면 최소 3개국 정보 당국이 각자가 파악한 다편적인 정보를 취합해 이를 끊임없이 연결하고 공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밀주의를 최우선으로 하는 정보 기관의 특성상 타기관, 그것도 다른 나라의 정보 당국과 긴밀히 첩보를 주고받는 것은 태생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함부르크 셀 역시 독일 정보당국의 감시를 받고 있었긴 했지만, 이들의 테러 실행 장소가 독일이 아니라 미국이었던 탓에 이들을 과소평가했다.
9·11 테러가 발생하자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독일 정보당국은 함부르크 셀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던 허점이 집중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이제 와서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이번 파리 테러에서도 마찬가지로 벨기에와 프랑스 정보기관의 사전 공조가 있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 있다는 점에서 9·11 테러의 교훈이 무색해지고 말았다.
특히 올해 1월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 뒤 두 나라 모두 자국내 테러 조직을 소탕하는 작전을 펼쳤음에도 더 큰 비극을 막지 못한 것은 뼈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이번 테러의 지령자로 지목된 IS 조직원 압델하미드 아바우드는 1월 벨기에에서 테러를 시도하려다 이 소탕 작전을 간신히 피해 시리아로 돌아간 인물이기도 하다
연합뉴스
벨기에에 사는 무슬림들이 테러의 ‘숙주’인 이슬람국가(IS)의 본거지 시리아로 건너가 극단적 지하디즘(이슬람 성전주의)에 포섭된 뒤 IS의 지령을 받아 ‘이슬람의 적’ 프랑스에서 동시 다발 테러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는 2001년 미국에서 벌어진 9·11 테러의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당시 알카에다의 오사마 빈라덴은 1998년 케냐·탄자니아 주재 미 대사관 동시테러 뒤 자신의 숨통을 조여오는 미국에 전세를 뒤집는 반격을 모색하던 중이었다.
1993년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 지하주차장 폭탄테러의 기획자 칼리드 셰이크 모하마드는 이런 빈라덴을 1999년 초 만나 항공기를 납치해 미국의 주요 시설물을 타격하는 전대미문의 테러를 논의한다.
실행 가능성에 의문을 가지면서 망설이는 빈라덴은 때마침 그의 앞에 나타난 함부르크 셀(또는 함부르크 그룹)을 만나면서 결심을 굳히게 된다.
독일 함부르크-하르부르크 기술대에 유학하던 모하마드 아타 등 당시 20대의 무슬림 4명은 함부르크의 한 아파트에서 함께 지내며 이슬람 극단주의에 젖어들었다.
이들은 고학력인데다 서구적 매너가 몸에 배고 영어에 능통해 의심을 받지 않고 미국으로 침투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뉴욕 세계무역센터 등 표적으로 납치한 여객기를 몰고 가려면 조종사 교육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언어와 학습 능력은 필수적이었다.
알카에다의 근거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빈라덴을 만나 충성을 맹세한 이들은 함부르크로 돌아가 미국 본토에 대한 항공기 테러를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이때부터 그들의 아파트는 알카에다 대원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소굴이 됐다.
함부르크 셀 4명 중 3명은 2000년 5월 미국 플로리다의 비행학교에 입학, 조종사 교육을 받은 뒤 2001년 추가로 합세한 알카에다 조직원 14명과 함께 9·11 테러라는 역사를 뒤흔든 사건을 가능케 한 장본인이 된다.
즉, 9·11 테러의 경위를 이번 파리 테러에 대입해 요약하자면 “아프가니스탄에서 계획되고 독일에서 조직돼 미국에서 실행에 옮겨졌다”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이 테러의 ‘삼각 네트워크’의 주어가 14년 만에 알카에다에서 IS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렇게 테러의 계획과 조직·공모, 실행 장소가 모두 다른 나라가 되면 이를 사전에 막아내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테러가 실행에 옮겨지기 전에 적발해내려면 최소 3개국 정보 당국이 각자가 파악한 다편적인 정보를 취합해 이를 끊임없이 연결하고 공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밀주의를 최우선으로 하는 정보 기관의 특성상 타기관, 그것도 다른 나라의 정보 당국과 긴밀히 첩보를 주고받는 것은 태생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함부르크 셀 역시 독일 정보당국의 감시를 받고 있었긴 했지만, 이들의 테러 실행 장소가 독일이 아니라 미국이었던 탓에 이들을 과소평가했다.
9·11 테러가 발생하자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독일 정보당국은 함부르크 셀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던 허점이 집중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이제 와서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이번 파리 테러에서도 마찬가지로 벨기에와 프랑스 정보기관의 사전 공조가 있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 있다는 점에서 9·11 테러의 교훈이 무색해지고 말았다.
특히 올해 1월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 뒤 두 나라 모두 자국내 테러 조직을 소탕하는 작전을 펼쳤음에도 더 큰 비극을 막지 못한 것은 뼈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이번 테러의 지령자로 지목된 IS 조직원 압델하미드 아바우드는 1월 벨기에에서 테러를 시도하려다 이 소탕 작전을 간신히 피해 시리아로 돌아간 인물이기도 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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